퇴직 후의 생활/여행과 사진

여름 날의 경주 -3(2022년 8월 15일)

물배(mulbae) 2022. 8. 31. 21:06

여름 날의 경주 - 3(2022815)

 

광복 77주년이고 末伏이다. 멀리는 남산의 서쪽 능선에서 뻗어 나온 크고 작은 수많은 골짜기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유서 깊은 연못 書出池와 연못 속에 피어있는 정갈하고 아름다운 연꽃과 저수지를 뒤덮고 있는 푸르른 연잎을 배경으로 몇 그루 배롱나무 붉은 꽃에 둘러싸여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亭子 이요당(二樂堂)出寫할 수 있는 일 년에 한 번뿐인 適期를 놓치기 싫어 또 다시 경주행을 했다. 가는 김에 벼르고 있던 선덕여왕릉도 이번 기회에 둘러보기로 작정하고 경주 터미널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 주차장)에서 내려 왕릉으로 갔다. 삼국유사에서도 叡智力이 뛰어난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신라 27, 632-647)에 대한 說話는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들어서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번 기회에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자료(나무 위키를 찾으면 자료가 너무 방대하여 골치가 아프다)를 찾아본다.

26대 진평왕의 세 딸 중 장녀(삼국사기 그러나 화랑세기에는 둘째 딸이라고 표기, 첫째는 천명 공주, 셋째는 선화 공주로 순서가 바뀌어져 있다)로 왕위에 오를 때부터 대내적으로 많은 반대와 대외적으로는 백제에게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는 등의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그래도 짧은 재위기간 중 김유신, 김춘추 등의 훌륭한 신하를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었고 황룡사 9층탑, 첨성대. 분황사 등을 창건하였으며 원효와 의상 같은 큰 스님들의 왕성한 포교활동 덕에 신라 불교 유산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드라마의 소재는 물론 첨성대나 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 月城 등엘 가면 여러 곳에 여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여왕의 세 가지 叡智力, 첫 번째는 당태종과 관계있는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 두 번째는 여근곡에 숨어있는 백제군사 이야기, 세 번째는 자신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인데 조금 설명을 하면, 여왕이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 모월 모일 내가 죽거든 낭산 남쪽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생긴 것이 이 왕릉이고 그 후 문무대왕 때 낭산 아래쪽에 사천왕사를 지었으나 허물어지고 절터만 남아 지금도 발굴하고 있다는 표시로 펜스만 둘러 세워져 있었다. 이 펜스를 따라 선덕왕릉 가는 길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따라가면 지금은 線路가 바뀌어 사용하지 않는 鐵路(일제강점기 때 철로를 건설하면서 왕릉의 精氣를 꺾기 위해 산을 잘라놓았단다)밑 도로를 따라 벼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넓은 들판을 보며 야트막한 산, 낭산을 오른다. 무릇 왕릉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 속에 둘러싸인 선덕왕릉은 다른 능에 비하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초라했다. 능을 둘러보며 반갑게도 이런 한적하고 외진 곳을 찾아 온 가족과 친구끼리의 몇 몇 관람객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왕릉을 돌아 나왔다.

다시 사천왕사지 앞 도로를 건너 동남산코스로 가는 길을 따라 화랑교를 지나 갯마을로 갔다. 전에도 몇 번 다녔던 동남산코스지만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내키지 않아 산길로 가기로 작정하고 보리사로 갔다. 보리사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오르막길은 날씨가 덥고 그늘도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 미륵곡 중턱에 있는 새로 지은 깨끗한 절 보리사는 올라올 때는 힘이 들어도 와서 보면 항상 올라오기를 잘했다는 느낌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절에서 내려다보는 조망도 그렇고 특히 한번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미남 佛像인 석조여래좌상(보물 136)도 보리사의 魅力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불상은 如來像이 갖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고, 특히 이 불상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고 섬세하며 光背 뒤쪽에도 약사여래상이 새겨져 있어 더욱 불교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보리사를 나와 몇 년 전에 가 본 마애석불이 생각이 나서 보리사 마애석불가는 길 표지판을 따라 좁은 산길로 방향을 잡아 산을 오른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풀은 무성하고 카메라는 무겁고, 가파른 길은 미끄럽고, 땀은 나고, 그래도 악착 같이 올라가다 보니 산등성이 암벽에 새겨진 볼품없는 자그마한 여래상이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선덕여왕, 신문왕릉이 있는 낭산도 보이고 사천왕사지 황룡사지도 보여 조망이 너무 좋다.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와서 도로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친김에 동남산을 오르기로 했다. 초행길이고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라 조심하면서 등산 리본만 보고 고위봉을 가는 방향을 잡아 산을 올랐다. 가다가 길가에 능이버섯 비슷한 버섯이 있길래 따서 사진을 찍어 462동기카페에 향이 너무 좋다. 이거 능이버섯 맞나?” 라고 올려 아리송답변을 듣고 먹으면 죽겠나등 등 쉬어가는 여유도 가지면서 산길을 걸었다. 중간에 천인바위도 만나고.

인적이라고는 없는 산길을 따라 방향만 가늠하고 걷다가 보니 내려가는 갈림길이 보여 하산하기로 하고 어림짐작으로 하산하니 드디어 정강왕릉이 나왔다. 재작년인가 동남산 코스 완주할 때 통일전 연못에서 산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이곳을 왔었기에 여기에서부터는 익숙한 길이다. 정강왕릉에서 통일전을 지나 드디어 서출지에 도착했다. 삼국유사 설화로 유명한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서출지, 신라 21대 소지왕,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서 임금에게 전하라고 준 글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射琴匣’ ‘烏忌日(정월 보름날, 까막까치를 위한 오곡밥)’의 전설이 있는 서출지다. 연꽃이 수면 가득 피어있는 서출지 서쪽 연못가에 남산을 등지고 서 있는 소박하고 우아한 정자 이요당(二樂堂)은 서출지 연꽃과 푸른 연잎을 배경으로 담 옆의 붉디붉은 배롱나무 꽃과 더불어 매년 이맘때만 볼 수 있는 絶景이 아닐까?

참고로 서출지는 1964년 사적 제138호문화재로 선정되었고 1972년 경주보존사업에 따라 1974년 이요당을 해체 중수하였으며 이 때 건물 대들보에서 건축 당시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이것을 근거로 이요당은 1664(현종 5) 旱魃이 심한 해에 鄕人 임적 선생이 서출지에 우물을 파서 한발을 구한 기념으로 1664년에 상량, 1667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선덕여왕릉

미륵곡 석가여래좌상

광배(약사여래상)

보리사 마애석불

산길에서 만난 버섯(향이 무척 좋다)

천인바위

천인바위

정강왕릉

서출지 향나무

이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