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신서정 문학회<시와 수필>

신인문학상-수필부문

물배(mulbae) 2008. 10. 6. 16:31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원과 구, 그리고 공 


 우리는 공간속에서 도형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눈만 뜨면 대하는 千態萬象의 도형들, 혹은 네모지고, 길쭉하고, 뾰족하고, 둥글고 … 이런 모든 도형 중에 원이 가장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형태를 가진 도형치고 어느 하나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는 것이 있으리까마는 원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圓이라 함은 이차원인 평면에서의 이름이요, 삼차원인 공간에서는 球다. 원과 구는 내용이 알차고 虛가 없이 꽉 메워졌을 때를 의미하니, 일정한 길이로 둘러싸인 면적을 가장 크게 했을 때가 圓이며, 표면적이 가장 작으면서  부피가 가장 큰 즉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충만 상태일 때의 만드는 모양이 球다. 연잎에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라. 아니면 풀잎에 맺혀있는 이슬방울을 보라. 異物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凝集된 상태가 역시 球形이 아니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양이 구형이고, 우주의 모양 또한 구형이니, 역시 구란 가장 많은 내용물을 포함하고 있을 때를 의미한다.  모든 동물 중 유독 사람의 머리만이 가장 구형에 가까우니 가히 사람의 두뇌 속에는 千思萬慮의 小宇宙가 들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緣故로 인간이 능히 만물의 靈長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원은 또한 처음과 끝이 없고, 구 역시 시작과 종말이 없다. 無始無終---- 「개미 체 바퀴 돌듯 한다.」할 때의 체 바퀴는 역시 원형이다. 개미가 체 바퀴를 아무리 돌아 봤자, 원형인 체 바퀴는 돌아 도 돌아도 끝이 없다.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은 또한 무형(無形)을 의미하며, 끝없는 회전이나 반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화폐단위는 원(중국은 위안, 일본은 원)이다. 모양대로라면 동전은 원이라 하고, 지폐는 방(方)이라 해야 함에도 다 같이 원이라고 함은 돌고 도는 돈이라고 끝없는 유통과정을 이름 하여 원이라고 하였을까?

 또 원형으로 생긴 물체는 마찰이 가장 작다. 물체가 원형으로 생기면 접촉하는 면적이 가장 작기 때문에 마찰이 가장 작고, 마찰이 가장 작기 때문에 부드럽다. 사람의 성격이 맺고 끊음이 없이 무난할 때 圓滿하다고 표현하며, 일이 거침없이 순조로울 때 圓滑하다고 함도 이 때문이다. 또 원형의 물체가 놓여있는 상태를 안정하지도 불안정하지도 않는 또 안정할 수도 불안정할 수도 있는 중립(中立)이라고 하며, 수레나 자동차나 물레방아의 바퀴가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음은 원형이 마찰이 가장 작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원형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이 즐겨 먹는 과일을 보라. 탐스럽게 달려있는 포도송이,감,밤,배,복숭아,사과,귤,호도,수박,참외 등등, 어느 하나 원형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아름답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느냐? 또 여자들의 액세서리를 보라. 대부분이 원형이 아니냐? 가락지가 그러하고, 목걸이가 그러하며, 귀걸이가 그러하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예로 들어보자. 만약에 사람의 얼굴이 정삼각형으로 생겼고, 눈동자가 정사각형이며, 코가 직사각형, 입이 육각형, 콧구멍이 모가 났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추하게 보일 것이냐? 역시 아름다움이란 보아 도 보아도 피곤함이 없는 원형만이 간직하고 있는 특성이 아닐까? 

 이러한 원이나 구가 내용이 비어 있을 때 우리는 공 또는 영이라 하며, 공이나 영도 원과 구의 변형에 불과하니, 원은 무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주는 둥글고 끝이 없으며 비어(眞空)있다. 밤하늘 수없이 반짝이는 별 하나하나가 거대한 우주 공간의 일부분이니 비어있는 우주는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함일 게다. 零 또한 그러하다. 모든 숫자가 영으로부터 비롯되고, 없다는 것은 앞으로 있을 것을 전제로 하니, 없다는 것과 많다는 것(10, 100, 1000…)을 영으로 표시할 줄 알았던 선인(先人)의 현명함이여!

 공허한 인생의 공은 유즉무(有卽無)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공은 無卽有니 有와 無가 동일해짐도 원의 조화일까? 사람의 살아감이 일면은 차고(滿) 일면은 빈(空) 원과 공의 조화상태에서 이루어지니 역시 원은 調和無窮·變化無常한 요술쟁이가 만든 도형이 아니고 무엇이랴.

 공자가 말했듯이 「君子不器라」--- 군자의 그릇은 물건을 담는데 불과한 작은 그릇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형태는 아마 원형으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샤르트르가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규정 지워지지 않는 인간」 즉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모양도 역시 원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圓과 球, 그리고 空이 가진 무한한 철학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공상


  사람은 태어나서 대개 몇 살적부터 공상을 하게 될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경험은 내 나이 일곱 살(나는 초등학교를 8살 때 들어갔고, 월반을 하여 5년만 다니고 졸업했다)쯤 되었을 때라고 추측된다.

 아마 겨울이었으리라. 난 그때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고, 밤, 쇠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핀 따뜻한 작은 방, 메주 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한 구들 목에 누워, 우리 집이 만약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다른 애들이 부러워할 만한 누구도 본 적 없는 커다란 풍선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나타난다는 등의 그런 공상을. 입 안 가득 사탕이 주는 달콤한 군침을 삼켜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공상에서 깨어나면 말할 수 없이 아쉽고 또 아쉬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상 속의 우리 집은 사과밭이었고, 친구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나만의 방(어릴 적 한 번도 내 방이 없었다)이 있고, 친구들이 돌아갈 때는 광에서 끄집어낸 사과를 몇 알씩 나눠 줄 수 있는, 그래서 내가 개구쟁이 꼬마들의 골목대장이 되는 그런 공상을 했다. 초등학교 상급학년 시절의 공상 속의 우리 집은 만홧가게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급우들만 불러 재미있는 만화를 함께 보는 공상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폭풍과 긴장(스텐리 호울)’의 시기인 사춘기,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 시절의 공상은 또래의 여학생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이나 내 주변의 모든 여학생이 대화의 대상이었고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밤새 전전긍긍했었다. 그로부터 명예, 재산, 여자, 권력 등으로 공상의 범주는 넓어졌으며,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씩 하는 공상 속의 나의 집은 항상 정원이 있는 아담한 한옥, 사방이 장서로 둘러싸인 서재가 있는 거실, 그 속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상상하곤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루어지지도 않을 허황한 공상에 빠져드는 것일까? 백치나 성인이 아닌 보통 사람치고 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공상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다르게 공상에 광적으로 몰두하여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 하기야, 그 시절 그때는 주위의 모든 여건이 너무나 암울하여,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과 잠재된 욕구불만(frustration)이 꿈을 대신한 공상으로 표출되었으리라. 지금은 까마득히 잊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었던지….

 변명 같지만 내가 공상을 즐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공상을 하는 시간은 누가 뭐래도 즐겁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도 공상 속에서는 쉽게 이루어지며,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어렵던 인간관계도 이성간의 대화도, 친구간의 갈등도 공상 속에서는 쉽게 풀어지는, 이 시간만큼은 아무런 방해가 없는 나 혼자서 즐기는(amuse myself) 시간이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오면 너무나 아쉽지만 공상을 하는 그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상 속에서는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일들만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공상 속에서까지 자신이 비참해지고 슬퍼지고 싶겠는가?

 또한 공상은 양심의 자유와 더불어 절대적인 자유에 속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외부에 표현하지 않는 한 아무리 나쁜 범죄라도 공상 속에서 저지르는 범죄는 처벌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은 생각만 해도 모자라는 나만의 시간 속으로 나쁜 생각까지 끌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또 공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너무 너무 자유롭다. 공상 속에서는 쉽게 수십 년 전으로 거스를 수도 있고, 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도 있고, 힘들게 지은 누각도 수없이 허물었다가 다시 지을 수 있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며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이 다. 

 공상이 이런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후회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변명을 해봐도 결국은 현실도피를 위한 나약한 심리상태가 부끄럽고, 허황한 공상으로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부끄럽다. 또한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었음을 후회하고, 꿈과 야망을 현실과 부딪쳐 이루어 내려는 의지가 약했음을 후회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신독이란 대학에 나오는 “군자는 신기독(愼其獨)하라.”는 말에서 비롯되었고, 군자는 모름지기 “혼자 있을 때 생기는 자기만이 아는 마음속의 변화에 조심하여 잡념이 생겨나지 않도록 극기(self- control)하고 자제(self-restraint)하여야 한다.”는 뜻이니 군자도 혼자 있을 때 죄의식이 생기는데, 하물며 나와 같은 소인배야 어찌 잡념이 아니 생기리오. 이퇴계의 말과 같이 ‘구졸막여근(救拙莫如勤 : 치졸함을 구하는 데는 부지런함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혼자 있는 시간은 되도록 줄이고,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움직여서(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등등)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떨쳐 버려야 하겠다.    

             

 

                                 * 손금과 그물 


 夜行列車 - 기적을 울리며 밤차가 달린다. 밤 열차의 승객들, 피로에 지쳐 옆 사람의 어깨를 베개 삼아 코를 고는 중년신사가 있는가하면, 서울로 시집간 딸을 보러 처음으로 나들이하는 시골 아주머니도 이 시간이면 정성이 담긴 귀중한 보퉁이(아마 틈틈이 준비한 갖가지 반찬이며 갓 쪄낸 인절미가 들어 있겠지)를 옆구리에 낀 채 졸고 있는 데, 그 옆에는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지껄이는 여행길의 대학생들, 화려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한복을 차려입은 신부와 언뜻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신혼여행 길의 신랑, 머리를 맞대고 자고 있는 신혼부부, 이런 千態萬象을 실은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리고 있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鐵路, 이 시간이면 언제나 밤 열차는 기적을 울리며 달렸겠지만, 오늘 밤 문득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고 뜨락에 내려서니, 맑게 갠 초겨울 밤, 열사흘 화사한 달빛이 창가에 드리워지고,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소리와 不協和音을 이룬 기차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스레 귓전을 때리며 지나간다. 이런 밤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성큼 내 앞에 다가선, 시공을 초월할 수 있을 듯한 착각을 한다.

 그러니까 수년전 이맘 때 어느 날, 젊은 시절에 흔히들 느껴보는 사소한 狂氣, 내가 설 素地를 찾아 헤매는 끝없는 彷徨, 廣闊을 동경하며 井底蛙의 삶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漠然한 충동, 원위치로 되돌아 올 줄을 뻔히 알면서도 漠然을 기대하는 동경심에 이끌려 서울행 급행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전신주의 행렬을 바라보며 無聊하게 앉아있던 내 옆자리에는 회색 袈裟를 입고, 등에는 조그만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아마 시주를 받은 것이겠지) 나이 많은 스님 한 분이 앉아계셨다.

“젊은 이 어디까지 가시나?”

“서울까지요.”      

“스님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나야 뭐, 조계산(송광사, 선암사가 있는 산) 어느 말사에서 살지만, 연중 300일은 떠돌아다니는 몸이라오.”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낯선 사람끼리 우연히 한 자리에 앉아, 같은 열차를 타고 간다는 이유(그 스님은 인연을 강조했었다.)만으로도 내릴 때 즈음에는 오랫동안 만난 사이처럼 친숙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恒茶飯 경험하는 일이리라.

“젊은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소?”

“저야 뭐, 열심히 숨을 쉬고, 손금대로 살고 있지요.”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이겠지만, 개미 체 바퀴 돌 듯 하는 반복된 생활, 인습에 얽매인 惰性, 안일한 나날의 연속, 噴出口만 있다면 咆哮하고 싶은 그 시절의 나에게 별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없었겠지.

“스님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시나요?”

“난, 열심히 그물을 뜨면서 지내지.”

사람은 누구나 그물(천망 :하늘의 그물)의 매듭으로 태어나서, 자기가 차지한 매듭을 확장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말도 맞는 것 같다. 어차피 그물은 매듭이 있어야 그물이 되고, 나를 매듭으로 한 그 그물 속에 얽히고 설긴 인간관계, 그 속에서 늦추고, 당기고, 부딪고, 각축하고…. 그물의 매듭은 나로부터 비롯되니 ‘天上天下 唯我獨尊’의 법리가 도출된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손금대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큰 그물을 뜨며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강조하시며, 옛날 강태공도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물러가 조용히 그물을 뜨고 있었기에 주나라 무왕이라는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는 덕담까지 곁들이셨다.

「손금」을 보며 하루를 살고 있다.

「그물」을 뜨며 하루를 살고 있다.

「손금도 보고, 그물도 뜨며」하루를 살고 있다.        

“젊은 이,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시오.” 合掌하며 천안에서 내리던 그 스님은 지금도 어디선가 열심히 그물을 뜨며 周遊天下하고 있으리라. 

 


          

                                           *워낭소리    

 

 소띠 해에 맞춰 개봉된 독립영화 워낭소리(우리는 워낭을 풍경이라고 불렀다)가 200만 명의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농사가 천하지 대본이었던 지난 시절에는 소가 농가의 큰 소득원이었고, 큰 재산이었으며, 트랙터나 경운기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농사를 짓는 상일꾼이었고, 자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팔려나갔던 애환서린 가족이나 다름없는 가축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시골에서 자란 장년층 이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소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기억을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빈농 출신인 나에게도 소와 관련된 기억들이 너무 많다. 내가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단다. 아무리 조숙해도 여섯 살이면 어린앤데 그 때부터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다녔다는 것이 거짓말 같은데, 대여섯 살이나 많은 동네 누나들과 함께 소를 끌고(사실은 소에 이끌려) 다니기 시작했고, 그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던 막내인 내가 저녁에 집에 오면 '출출한데 젖이나 한통 먹자' 라고 하면서 젖을 빨았다는 이야기를 며느리인 아내에게 해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으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살찌우고 키워 조금만 크면 돈을 떼기 위해서 우시장에 소를 내다 팔고, 다시 어린 소를 사기 때문에 우리 집 소는 항상 한두 살배기 애 동내기 황소 였기에, 밖에만 나가면 천방지축으로 까불었고, 이런 소 때문에 울어 버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때가 되어 소를 몰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고삐가 풀린 소가 갑자기, 산 위에서 아래로 한걸음에 내달렸다. 소를 따라 오느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엄마, 소의 다리가 네 갠데, 오늘 보니 다리가 두 개 밖에 없더라." 라고 햇다고 그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어머니가 말씀 하시곤 했다.

 초등학교 저급 학년 때의 일이었다. 누워 있는 소가 한가로이 되새김질을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씹고 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입안을 들어다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양 볼에 계란 같이 불툭 튀어나온 것만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고삐를 잡고 손가락을 입 속에 쑤셔 넣어 보았다. 그랬더니 손가락을 넣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와서 급히 손을 뺐는데 아뿔사, 날카로운 어금니에 손가락의 살점이 떨어졌다. 소는 입속 깊숙한 곳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있어 급하게 뜯어먹은 풀을 위 속에 저장하였다가 한가할 때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지금도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난 흉터를 보고 그 때 하마터면 손가락을 잘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사람은 코를 막으면 입으로 숨을 쉬는데 다른 동물도 코를 막으면 입으로 숨을 쉴 수 있을까가 너무도 궁금해서 먼저 개에게 실험을 하였다. 개 코를 잡고 한참을 기다리니 개는 '컥' 하며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어느 날 실험에 들어갔다. 고삐를 잡고 그 큰 콧구멍을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막으려니 도저히 그 넓은 콧구멍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상 수단으로 쑥을 한 웅큼 뜯어 비벼서 양쪽 콧구멍을 막았겠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며 주시하고 있는데 한참동안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더니 이 미련한 놈이 숨을 내쉬면 될 것을 자꾸만 들이쉬는 바람에 쑥이 콧구멍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겄이었다. 겁이 난 나는 손가락으로 소 콧구멍을 후벼 파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개는 인두와 후두가 뚫려 있는데 소는 막혀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결론을 얻었다.

 한 번은 소를 끌고 앞서가던 나에게 이놈의 소가 내가 암소로 보였던지 앞다리를 치켜들고 코를 씩씩거리며 나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 도망을 갔고---. 암내가 난 암소와 교미를 한 후 "송아지를 낳고 난 후 콩 한 말 줄게" 하시던 어른들의 말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찌 이것 뿐이랴. 소를 타기 위해 좁은 도랑에 소를 몰아넣고 등에 올라타다가 소가 달아나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서도 끝까지 올라타던 일, 그래서 바지에 묻은 소털 때문에 집에 와서 꾸중을 듣던 일, 고삐를 푼 소가 달아나서 따라가는데 내가 빨리 뛰면 더 빨리 뛰고, 천천이 가면 그 놈도 천천이 가며 약을 올리던 일, 저수지를 여섯 바퀴나 돈 후 천신만고 끝에 붙잡아 소나무 그루터기에 고삐를 매고 실컷 두드려 패며 분풀이를 하던 일, 어린 나에게 두드려 맞고도 눈만 껌뻑거리던 그 순박한 눈망울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시골에 가더라도 지금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 까마득한 예날 이야기지만, 소를 생각하면 그 시절 시골 풍경이 생각나고,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다. 봄, 아지랑이 아롱거리던 들판에는 온갓 풀들이 돋아나고, 버들강아지 피어 있는 시냇가에는 여울물이 흐르고, 할미꽃 피어나는 야산 기슭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나는 봄,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보리밭을 메는 아낙네들, 진달래꽃 가지 꺾어 꽂은 나뭇짐을 짊어지고 지게작대기 두드리려 산을 내려오던 일꾼들, 꼴망태를 메고 소를 몰고 산야를 헤매던 그 수많은 봄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애잔하다. 그러나 형님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가족과 같던 소를 팔고 힘없이 걸어오시던 선친의 처량하던 모습이 영화 '워낭소리'와 겹쳐 옛날이 다시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