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유감
― 팔자는 길들이기 나름이다.―
부산 동기회 배 명 조
병술 년 음력 이월 초엿새 술시, 이게 나의 사주팔자다. 누가 뭐래도 이건 변경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타고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나 혼자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다.
수년 전 언젠가 컴퓨터반이 새로 생겨 컴퓨터가 농담 삼아 뽑아 준 나의 알량한 평생 사주를 만나게 되었다. 하여간 그 속에 하였으되 초년 궁을 볼라치면 초년에 복이 없어 한 때 몹시 곤궁하리라고 적혀 있었거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 궁핍하지 않은 놈 몇 놈이 있었으랴. 특히 촌놈인 나는 조금은 더 어려웠을까? 또, 생년에 천예성(?)이 비치니 출중한 재주가 있고 친구 사귐을 좋아하니 출입을 자주 하도다. 말마다 옳은 말이로다.
중년 궁을 볼라치면 삼십 이후의 운은 고목에 봄을 만나 삼십 삼사 세는 재물이 크게 왕성하고 벼슬에 나갈 운이 있어 임금의 은혜를 받으리라고 했는데(아직은 중년이 다 지나지 않았으니 기대해 볼 수밖에), 부부 궁을 볼라치면 정분은 흠이 없고 부처가 화락한다고 했고(그러니까 나 같은 놈도 총각 신세 면했고), 자식 궁을 볼라치면 많은 자식 중(많지는 않지만 2남 1녀를 두었으니 친구들은 모두 미개인이라 한다.), 한 자식은 귀히 되리라 했으니 이것도 아직은 두고 보아야 알 일.
말년 궁은 더욱 좋아 부귀영화는 물론 손에 천금을 희롱한다고 했고(때 늦기 전에 미리 미리 나에게 좀 더 잘 보일 필요가 있음.), 수명도 백수를 누리리라 했으니, 내 비록 쓴 소주 일 배일망정 아무리 마셔대도 아흔아홉 살 까지는 틀림없이 살 것인 즉, 건강에는 아무 걱정이 없으리라. (이 말 때문에 사실은 마누라에게 큰 소리만 치다가 창피만 당했음.) 중년의 직업은 토목이나 건축업이 업 중에 가장 적당하다고 했거늘 그래서인지 한 삼사 년 전 집을 한 채 지었는데 갑자기 땅 값이 솟아오르고, 건축자재 값도 올라 돈을 벌었다면 벌었다고 할 수 있을지니 어화 좋을 씨고.
그런데 딱 한 가지 맞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우리의 친구 구 국본 원장과 본인이 용케도 생년월일이 같으니 이는 분명 사주팔자가 같을 것이데, 왜 자기는 치과병원을 차려 병원장을 하며, 나는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분명히 팔자에는 없었음.), 철없는 떠꺼머리 학생들과 더불어 별로 근엄하지도 않으면서 근엄한 척, 아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위신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구시렁거려야 하는지는 아리송하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인생은 蓋棺而評(개관이평)이라고, 즉 관 뚜껑을 덮어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니, 인생은 전반부 보다는 후반부가 더 중요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우리 친구 구 원장의 年齒(연치:나이)가 많아지고, 나도 정년퇴직을 하고 난후 그 때 가서 다시 사주팔자를 대조해 봄이 여하리오.
말이 나왔으니 우리 경북중·고 46회 동기회 30주년 행사를 마치고 나니 지나간 긴 긴 시간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어 그지없이 반갑고(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니까), 뜻대로 행하지는 못할망정 마음으로야 무슨 짓을 못할까 하는 오기에서 생각은 멀리, 지금은 없어진 고향 하늘로 날아간다. 삼사십 년을 단숨에 뛰어 넘고, 멀리 떨어진 공간을 넘고 넘어 이 지구상의 같은 하늘밑, 같은 공기로 숨 쉬고 있는 우리 46회 동기생들, ‘친구와 술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던가. 만나 대포 잔이라도 나누며 가슴 속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도 못하니 안타깝도다. 모두들 부디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 하소서.
(이 글은 1995년, 경북중·고 제46회 졸업 30주년 기념문집에 게제한 글이며,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인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친구와 우연의 일치로 생년월일이 같음을 알리기 위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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