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의 생활/日常에서

꽃무릇(2023년 9월 18일)

물배(mulbae) 2023. 9. 21. 21:37

 삼밭골 가는 길, 장전동 '어울마당' 길 옆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 무릇을 보고 옛날에 썼던 '꽃 따로, 잎 따로'가 생각나 다시 올린다.

 

                                              꽃 따로, 잎 따로

 

 내가 세()들어 살고 있는 이 집 정원에는 이름 모를 한 포기 꽃이 있습니다. 지난 가을 우리 가족이 이 집으로 이사를 한 지 약 4개월쯤 지났을까한 비 온 뒤의 어느 상쾌한 초가을 아침, 정원의 한 귀퉁이에 느닷없이 나타난 기다란 꽃대 위에 현란하게 피어있는 세 송이의 꽃을 발견하곤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꽃 주위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당연히 있어야할 잎사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잎사귀가 없는 꽃이라니!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허허한 모래벌판 위에 드문드문 꽂아 놓은 세 송이 조화(造花)마냥, 땅의 요정이 부린 요술치고는 너무나도 기묘한 정경이었습니다.

 꽃 치고 아름답지 아니한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자세하게 살펴보니 이 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길고 굵고 싱싱한 꽃대 위에 무리지어 나온 백합꽃잎을 닮은 선홍빛 붉은 꽃잎은 마치 펼쳐진 공작의 날개처럼 현란하였으며, 꽃잎 밖으로 튀어나온 여섯 개의 수술은 마치 화염 속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꽃이 시든 지도, 꽃의 아름다움을 잊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원산(遠山)에 잔설(殘雪)만이 희끗희끗 남은 금년 초 봄, 작년에 꽃을 피웠던 그 자리에 난()잎처럼 생긴 파란 잎사귀가 돋아났습니다. 얼어붙었던 지표를 뚫고 나오는 이 놀랍고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사를 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핀 바로 그 아름다운 꽃이 생각났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잎은 초봄에 인고(忍苦)를 이기고 돋아나서 여름의 폭염(暴炎)에 시들어버리고, 신선한 초가을 양광(陽光)에 시든 꽃잎이 환골 탈퇴하여,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돋아난다는 사실을.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고 기온이 변해도 튼튼한 뿌리는 언제나 땅 속에서 살아 숨 쉬며 건재(健在)하여, 잎과 꽃을 번갈아가며 땅 위로 내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부리는 조화는 정말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무궁무진(無窮無盡)합니다. 꽃은 사람이 아름답다 해서 피는 것이 아니라 필 때가 되어 핀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꽃을 보는 것은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잎을 포함한 꽃나무 전체를 보는 것일 진데, 잎 먼저 보고, 떨어진 그 잎사귀를 오래오래 기억해 두었다가, 꽃이 필 때 꽃과 잎을 함께 생각해 달라는 이 이름 모를 꽃의 심술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어차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명화(名花)는 무실(無實)하고 채운(彩雲)은 이산(易散)이라고,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언젠가는 시들어버리고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으며 무지개 색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잎을 볼 때는 꽃을 상상하며, 꽃을 볼 때는 잎을 기억하라는 경종이 아닐까 생각한다.

* 나중에 이 꽃 이름이 꽃무릇(다른 이름으로 석산,石蒜)이라는 것을 알았고, 백합목, 수선화과의 다년생 꽃으로, 전남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 전북 고창 선운사 주위에 9월 중순에 가면 눈부신 꽃무릇, 꽃동산을 볼 수 있다.

** 꽃과 잎이 따로 피는 꽃은 상사화(相思花 :꽃과 잎이 서로를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도 있으며, 꽃무릇과 다른 점은 꽃무릇은 9, 10월에 꽃이 피나 상사화는 8월에 피며, 꽃무릇은 선홍색이고, 상사화는 분홍색 또는 연한 자주색의 꽃이 핀다는 점이다.  

꽃무릇

상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