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배의 교단수필/정년기념 수상집

미인대회, 공상

물배(mulbae) 2009. 1. 23. 10:44

                                 미인대회


옛날 사람들이 그린 미인도(중국의 4대 미인도도 마찬가지)를 보거나, 사당에 걸려있는 춘향이나 논개나 아랑의 영정을 보면 하나같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풍전세류(風前細柳)와 같이 미풍만 불어도 하늘거리는 늘어진 능수버들 가지 같은 가는 허리, 옛날 사람 같지 않는 늘씬한 체형, 곱게 단장한 흑단 같은 머릿결, 계란같이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크고 둥근 눈, 오똑한 콧날, 앵두 같은 입술에 갸름한 턱선, 아미(蛾眉: 누에나방의 더듬이와 같은 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눈썹)와 같은 눈썹에 입가에 머금은 희미한 미소 등 눈썰미가 없는 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비슷비슷하다. 이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동양의 전통적인 미의 기준에는 선(線)을 중심으로 한 섬세함이 내재(內在)되어 있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며, 색채(色彩) 짙은 농후(濃厚)함보다는 순박한 담백(淡白)함을 심미의 기준으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요즈음의 미인대회를 보자. 옛날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중국의 양귀비(당나라 현종의 비, 꽃도 부끄러워할 정도의 미인이라 하여 羞花라고도 하나 사실은 뚱녀였다고 함)나, 서시(전국시대 월나라 미인. 강물에 모습을 비추자 물고기도 헤엄치는 것을 잊었다고 해서 侵魚), 왕소군(한나라 미인. 琴을 연주하자 기러기도 날갯짓을 멈췄다고 落雁), 초선(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한나라 미인. 달을 보니,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었다고 閉月)이 오늘날의 미인대회에 나온다면 과연 입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요즈음의 미인대회에는, 미인의 기준이 측정도구에 의해서 결정되어 키는 몇 센티미터이며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이고 가슴, 허리, 엉덩이 둘레는 각각 몇 인치인가에 따라 등위가 결정된다. 이런 과학적 심사기준에 재색(才色)만을 겸비한 옛날 미인이 어떻게 입상할 수 있으랴! 아마 본선은커녕 예선에도 통과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면 미의 본질은 무엇일까? 옛날 학창시절 철학시간에 노 교수님이 강의 도중 어느 여학생에게 미(美)의 정의를 물었는데 그 여학생이 대답하기를 “선이 둥글고, 색깔이 연하고, 만지면 말랑말랑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적이 있었다. 미의 본질은 주로 ‘보고 듣는 감각을 통하여 얻는 기쁨이나 쾌락을 주는 근원적 아름다움’으로 정의하지만 미의 판단기준은 전적으로 개인의 감정이 얽힌 주관적인 인식이므로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미에 대한 판단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미의 본질이야 변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미에 대한 판단도 결국은 보편성과 객관성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나에게는 천사같이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추녀로 보인다면 그 사람을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마마자국도 보조개’로 보이는 사랑에 눈 먼 사람의 말만으로는 미인을 규정하지 못하리라.

 고루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같은 미인대회는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인대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나의 감정은 자못 씁쓸하다. 간혹 물의를 일으키는 낙태나 누드모델 등 도덕성의 퇴락은 극히 일부에 국한한다고 한번쯤 봐 줄 수도 있지만, 화려한 축제 뒤에 숨어있는 여성의 상품화, 돈벌이에만 눈이 먼 상업적인 이벤트, 벌거벗은 차림으로 사람들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행사 진행, 생동감 넘치는 젊음의 축제라기보다는 진열장 속에 서 있는 마네킹 혹은 비키니 입은 인조인간을 보는듯한 어색함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일까? 진정한 미인은 눈의 크기가 몇 센티라서, 턱의 각도가 몇 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여인이 진정한 미인이 아닐까? 그저 멍하게 쳐다만 보아도 기쁜 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미인을 선발하는 미인대회를 보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공상


  사람은 태어나서 대개 몇 살적부터 공상을 하게 될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경험은 내 나이 일곱 살(나는 초등학교를 8살 때 들어갔고, 월반을 하여 5년만 다니고 졸업했다)쯤 되었을 때라고 추측된다.

 아마 겨울이었으리라. 난 그때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고, 밤, 쇠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핀 따뜻한 작은 방, 메주 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한 구들 목에 누워, 우리 집이 만약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다른 애들이 부러워할 만한 누구도 본 적 없는 커다란 풍선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나타난다는 등의 그런 공상을. 입 안 가득 사탕이 주는 달콤한 군침을 삼켜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공상에서 깨어나면 말할 수 없이 아쉽고 또 아쉬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상 속의 우리 집은 사과밭이었고, 친구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나만의 방(어릴 적 한 번도 내 방이 없었다)이 있고, 친구들이 돌아갈 때는 광에서 끄집어낸 사과를 몇 알씩 나눠 줄 수 있는, 그래서 내가 개구쟁이 꼬마들의 골목대장이 되는 그런 공상을 했다. 초등학교 상급학년 시절의 공상 속의 우리 집은 만홧가게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급우들만 불러 재미있는 만화를 함께 보는 공상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폭풍과 긴장(스텐리 호울)’의 시기인 사춘기,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 시절의 공상은 또래의 여학생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이나 내 주변의 모든 여학생이 대화의 대상이었고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밤새 전전긍긍했었다. 그로부터 명예, 재산, 여자, 권력 등으로 공상의 범주는 넓어졌으며,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씩 하는 공상 속의 나의 집은 항상 정원이 있는 아담한 한옥, 사방이 장서로 둘러싸인 서재가 있는 거실, 그 속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상상하곤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루어지지도 않을 허황한 공상에 빠져드는 것일까? 백치나 성인이 아닌 보통 사람치고 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공상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다르게 공상에 광적으로 몰두하여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 하기야, 그 시절 그때는 주위의 모든 여건이 너무나 암울하여,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과 잠재된 욕구불만(frustration)이 꿈을 대신한 공상으로 표출되었으리라. 지금은 까마득히 잊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었던지….

 변명 같지만 내가 공상을 즐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공상을 하는 시간은 누가 뭐래도 즐겁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도 공상 속에서는 쉽게 이루어지며,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어렵던 인간관계도 이성간의 대화도, 친구간의 갈등도 공상 속에서는 쉽게 풀어지는, 이 시간만큼은 아무런 방해가 없는 나 혼자서 즐기는(amuse myself) 시간이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오면 너무나 아쉽지만 공상을 하는 그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상 속에서는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일들만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공상 속에서까지 자신이 비참해지고 슬퍼지고 싶겠는가?

 또한 공상은 양심의 자유와 더불어 절대적인 자유에 속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외부에 표현하지 않는 한 아무리 나쁜 범죄라도 공상 속에서 저지르는 범죄는 처벌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은 생각만 해도 모자라는 나만의 시간 속으로 나쁜 생각까지 끌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또 공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너무 너무 자유롭다. 공상 속에서는 쉽게 수십 년 전으로 거스를 수도 있고, 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도 있고, 힘들게 지은 누각도 수없이 허물었다가 다시 지을 수 있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며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이 다. 

 공상이 이런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후회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변명을 해봐도 결국은 현실도피를 위한 나약한 심리상태가 부끄럽고, 허황한 공상으로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부끄럽다. 또한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었음을 후회하고, 꿈과 야망을 현실과 부딪쳐 이루어 내려는 의지가 약했음을 후회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신독이란 대학에 나오는 “군자는 신기독(愼其獨)하라.”는 말에서 비롯되었고, 군자는 모름지기 “혼자 있을 때 생기는 자기만이 아는 마음속의 변화에 조심하여 잡념이 생겨나지 않도록 극기(self- control)하고 자제(self-restraint)하여야 한다.”는 뜻이니 군자도 혼자 있을 때 죄의식이 생기는데, 하물며 나와 같은 소인배야 어찌 잡념이 아니 생기리오. 이퇴계의 말과 같이 ‘구졸막여근(救拙莫如勤 : 치졸함을 구하는 데는 부지런함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혼자 있는 시간은 되도록 줄이고,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움직여서(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등등)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떨쳐 버려야 하겠다.